중봉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시고 순국하신
‘의(義)를 행한 선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봉 선생은 애국과 의를 행한 분입니다.
그러나 중봉 선생은 단순히 애국과 의를 행한 분을 넘어서 ‘도(道)를 행한 선비’입니다.
중봉 선생은 도를 구하는 구도의 자세(救道)로 나라와 백성을 구한 분입니다.
중봉 선생은 의병장이기 이전에 당대 최고의 도학자였습니다.
중봉 선생이 추구한 도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아끼는 도입니다.
중봉 선생은 정암 조광조의 충효[忠孝]와 퇴계 이황의 학문[學問]이 하나의 맥으로 율곡 이이에게 밝게 이었다고 인식하였고,
자신이 일생동안 이러한 정신과 학문을 잇는다는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중봉 선생은 ‘올바른 일은 반드시 받들어 행해야 하고 부당한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대하고 저항하라’는 도학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살았습니다.
중봉 선생은 자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바로 임금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중봉 선생은 명나라에 다녀온 뒤, 출신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등용하고 공·사 노비의 양민화를 주장하면서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중봉 선생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봉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왜국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 대비책을 강력히 건의하였습니다.
전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에 중봉 선생은 왜적이 곧 쳐들어올 것이라는 상소를 올리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대비하지 않는다면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치라는 강력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습니다.
중봉 선생은 왜국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 판단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습니다.
그 상소에 왜적이 어디로 침입할지, 어느 지역을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각 지역의 방어에는 어느 인물이 적합할지 등 구체적인 전란 대책을 적어 올렸습니다.
중봉 선생의 상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봉 선생은 원망에 빠져 있지 않고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준비했습니다.
문인들과 인재를 모아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중봉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즉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금산에서 700 의병과 수 백 명의 승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과 싸워 중과부적으로 전사했습니다.
중봉 선생이 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은 숭고한 행도(行道; 도를 행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봉 선생은 왜적이 저지른 조선 침략은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 정의와 인도를 유린한 만행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만행을 저지르는 자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인도를 유린하는 폭거를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중봉 선생의 삶과 학문에 대해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더불어 선비의 으뜸가는 본보기라고 평했습니다.
정암(조광조)의 맑고 곧음 靜庵之明直
퇴계(이황)의 깊음과 삼가함 退溪之沈謹
율곡(이이)의 상세함과 화평함 栗谷之詳和
중봉(조헌)의 근면함과 확고함은 重峯之勤確
선비의 으뜸가는 본보기이다. 儒者之宗準也。
(이덕무, [청장관전서], 권 28, <士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