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

  • 11544년(중종 39년 甲辰)  
    6월 28일 사시(巳時)에 김포현 서쪽 감정리(坎井里)에서 출생
  • 21548년(명종 3년 戊申 5세) 
     김포 임정에서 글을 읽다가 고관의 행차 소리에 아이들이 모두  구경하러 나갔으나 홀로 의연히 앉아 책을 읽었다. 고관이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을 예언하다.
  • 31551년(명종 6년 辛亥 8세) 
    부모를 섬기는 예를 알아 부모의 명이 있으면 반드시 꿇어앉아서 대하고 모든 일을 공경으로 대하였으며 밭농사를 부지런히 도왔다.
  • 41553년(명종 8년 癸丑 10세)
     어머니 차씨(車氏)부인의 상을 당하여 슬프게 사모하는 모습이 어른 같았다.
  • 51555년(명종 10년 乙卯 12세) 
    김황(金滉)에게서 시서(詩書)를 수학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한겨울에도 다 떨어진 옷과 신으로 추위를 참고 글방을 다녔다.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밭두렁에 막대기로 서가를 만들어 농사일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공부하였다.
  • 61559년(명종 14년 己未 16세) 
    경서와 시서에 몰두하여 침식을 잃다.
     참을 알고 실천함에 옛 성현과 같이하고, 늘 격앙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남자를 낸 뜻이 어찌 우연이리오(天生男子之意 豈偶然哉)”라 하였다.
      요순탕무(尭舜湯武)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공맹정주(公孟程朱)가 아니면 배우지 아니하였다. 
  • 71561년(명종 16년 辛酉 18세) 
    영월 신씨(寧越辛氏) 신세성(辛世誠)의 딸과 혼인하였다.
  • 81563년(명종 18년 癸亥 20세)
     양천강(陽川江)을 건널 때 큰바람을 만나 배 안의 사람들이 사색이 되었으나 선생은 앉아 태연하게 웃으며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도망치며 울부짖는다 해서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 하였다. 김후재(金厚載)란 선비가 감탄하여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 91565년(명종 20년 乙丑 22세)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다.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승 보우(僧 普雨)의 잘못을 상소로 논하여 대궐 문 앞에 엎드려 기다렸으나 임금의 비답이 없었다.
      다른 유생들과 달리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르게 앉아 자리를 뜨지 않았다.
  • 101566년(명종 21년 丙寅 23세) 
     온성도호부(穏城都護府) 훈도(訓導)에 임명되다.
  • 111567년(명종 22년 丁卯 24세) 
     가을에 감시(監試)와 동당삼장(東堂三場)에 모두 합격하다.
     11월에 병과(丙科) 제9인으로 급제(及第)하다.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다.
  • 121568년(선조 원년 戊辰 25세) 
     정주목 교수(定州牧教授)에 임명되다.
     선생이 교육에 힘을 기울인 지 3년 만에 사풍(士風)이 크게 변하였다
  • 131570년(선조 3년 庚午 27세) 
     파주목 교수(坡州牧教授)로 전근 되다.
     우계(牛渓) 성혼(成渾)에게 학문을 청하다. 우계는 선생을 외우(畏友)라 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스승으로 섬기다. 
  • 141571년(선조 4년 辛未 28세) 
     홍주목 교수(洪州牧教授)에 임명되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다. 토정은 선생의 학문에 놀라 “그대의 덕기는 내가 가르칠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양하다. 
    토정의 권유로 성혼(成渾),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섬기고 구봉 송익필(亀峯 宋翼弼)과 고청 서기(孤青 徐起)를 찾아뵈다.
  • 151572년(선조 5년 壬申 29세)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임명되다.
      6월 궁중 불사(仏寺) 및 자수궁(慈寿宮), 성숙청(星宿庁)에 향을 바치는 것을 반대 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삭직되다. 
    이지함과 부여의 강사(江沙)에서 노닐고 두류산(頭流山)으로 서기를 찾아 몇 달 동안 학문을 닦고 돌아왔다. 
    다시 안면도를 구경하다.
  • 161573년(선조 6년 癸酉 30세)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에 승직 되었다.
     다시 향실의 직무를 맡게 되어 또, 봉향을 못하겠다는 상소(論香祝疏)를 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죄로 다스리려 했다. 
    양사(両司: 司憲府, 司諫院)와 홍문관(弘文館) 의 공경 대신들의 구원으로 벌을 면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의 곧은 말이 세상에 떨쳐 위로는 조신(朝臣)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귀기를 원하였다.
  • 171574년(선조 7년 甲戌 31세) 
     5월 질정관(質正官)으로서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과 명(明)나라에 가다. 
     8월 4일 명나라 서울에 이르러 8월 9일 대명전(大明殿)에 들어가고 17일에 황극전(皇極殿)에서 성절하례식(聖節賀礼式)에 참석하다. 
    명나라 예부에 글을 올려 성묘의 위차(位次)를 질문하니 예부 제공(諸公)이 왕복 논란하며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팔조소(八条疏)을 올리다.
  • 181575년(선조 8년 乙亥 32세)
     교서관 박사(校書館博士), 호조좌랑(戸曹佐郎), 예조좌랑(礼曹佐郎),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12월에 통진현감 (通津県監)에 제수 되다. 
       주자대전어류(朱子大全語類)를 유희춘(柳希春)과 더불어 교진(校進)하다.
  • 191577년(선조 10년 丁丑 34세) 
     겨울에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통진 현감이 되어 스스로 검소하고 폐단을 없애기 힘써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편안하게 되었다. 
    권세를 믿고 횡행하는 내노(内奴 궁노비)의 작폐를 장으로 다스리다 그가 죽어서 귀양가게 되었다.
  • 201578년(선조 11년 戊寅 35세) 
     정월 24일 부친상을 당하다. 본가가 배소(配所) 몇 십리 밖에 안되었으나 죄인의 몸이어서 집에 갈 수 없어 아침 · 저녁으로 곡을 하니 
    듣는 이 모두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지함(李之菡) 찾아와 조상하였다.
  • 11580년(선조 13년 庚辰 37세) 
     봄에 상복을 벗다. 4월에 귀양살이에서 풀리다.
      윤4월에 보령을 찾아 돌아가신 이지함(李之菡)을 제사 지내고, 명곡서당(鳴谷書堂)에서 몇 개월간 강학하고 돌아오다.
     가을에 해주 석담(石潭)으로 율곡(栗谷) 선생을 찾아뵙고 몇 달 동안 강학하다. 
    돌아올 때 율곡이 호연정(浩然亭)까지 나와 시를 지어 배웅했다. 황해도 관찰사 이해수(李海寿)도 전송하러 나왔다.
  • 21581년(선조 14년 辛巳 38세) 
     봄에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부임하다.
     소(疏)를 올려 연산조의 공안(貢案) 혁파와 이이(李珥)의 외롭고 위태함을 논하니 임금의 비답은 있었으나 받아들여 쓰여지지는 않았다.
     송강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観察使)가 되어 도 경계에 이르자 친교를 맺고 있던 이발(李溌), 김우옹(金宇顒)이 그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날로 떠나려 하였다. 
    이에 정철이 성혼과 이이에 청을 넣어 두 분의 권유로 다시 전주로 돌아갔다. 
    그 뒤 갈수록 두 분의 정의가 두터워졌다. 선생이 정철에게 “내가 처음에는 타인으로 인하여 공을 잃을 뻔했다”고 하였다.
  • 31582년(선조 15년 壬午 39세)
     임기가 만료되어 종묘령(宗廟令)에 전임되다.
     8월에 보은현감(報恩県監)이 되다. 선생이 계모를 모시기 위해서 외직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부임해서 상소를 올려 민간의 질고(疾苦) 및 내수외양지책(内修外攘之策),
     노산군 (魯山君)의 후사를 세우고 사육신(死六臣)을 정표(旌表)할 것, 왕자(王子) 제택(第宅)의 사치를 금할 것을 청하다.(이 소는 전하지 않음)
  • 41583년(선조 16년 癸未 40세) 
     보은현감(報恩県監)에 다시 임명되다.
     가을에 경차관(敬差官) 이산보(李山甫)가 호서지방의 민심을 살피고 돌아와 임금에게 좌도에는 보은현감 조헌의 백성 다스림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거울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송순(宋諄) 등이 사감을 품고 선생의 파직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이와같은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논계 7일 동안에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51584년(선조 17년 甲申 41세) 
     정월에 이이(李珥)의 죽음을 듣고 우위(虞位)를 베풀고 곡(哭)하다. 또, 만시(輓詩)를 짓다. 
      겨울에 다시 대간(台諫)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다. 
      서울을 피하여 옥천(沃川) 안읍(安邑) 밤티(栗峙) 산속으로 옮겨 후율정사(後栗精舎)를 짓고 세상을 등지고 강론(講論)하다.
  • 61585년(선조 18년 乙酉 42세) 
     이발(李溌)과 절교하다.
     당론(党論)이 극심해져 정여립(鄭汝立)이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모함하고 이발에 동조하니 선생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아 교제를 끊었다.
  • 71586년(선조 19년 丙戌 43세) 
     공주목교수 겸 제독속독교관(公州牧教授兼提督属教官)에 임명되다.
     10월에 만언소(万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성혼, 이이의 충현(忠賢)을 간곡히 진언하였다.
  • 81587년(선조 20년 丁亥 44세) 
     여름, 간사한 무리가 나라를 그르침과 정여립의 흉패함을 논하는 만언소를 현도 상소(県道上疏)하였으나 관찰사가 이를 받지않다, 
    이에 짧은 소를 지어 6월에서 9월까지 다섯 차례를 올렸으나 이를 모두 받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문묘(文廟)에 글을 지어 고별하고 옥천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강학으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11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오다. 선생이 왜사(倭使)를 배척하여 끊을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관찰사가 이를 올리지 않았다.
      12월, 다시 소(疏) 지어 대궐 문 앞에 나아가 이전의 소와 함께 2소(二疏)를지어 올리다. 
       이 소에서 왜국 사신의 척절(折絶)과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친다고 논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소를 불태워 버리게 하여 어쩔 수 없이 옥천으로 돌아 오다.
      돌아오는 길에 서기(徐起)를 방문하니 그의 직소를 잘못이라고 꾸짖었으나
      소장(疏状)을 읽고는 의관을 바로하고 재배(再拝)한 후 “공(公)의 이 소(疏)에 의지하여 우리나라는 장차 화(禍)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 91588년(선조 21년 戊子 45세) 
     김포 선영(先塋)에 성묘하고 돌아오다.
  • 101589년(선조 22년 己丑 46세) 
     4월, 지부상소(持斧上疏)하여 시폐(時弊)를 극론하다. 
     이로 인하여 함경도 길주 영동역(嶺東駅)에 정배(定配)되다. 
     이때 북방에 여역(癘疫)이 유행하여 선생의 아우 전(典)이 유배길에 따라갔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귀양 땅에서 소(疏)를 올려 왜국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지 말 것을 청하다. 
     11월 4일에 귀양살이에서 풀리다.
     10월에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발각되니 호남 유생들이 계(啓)를 올려 선견지명이 있다하여 특명이 내리다.
      또, 상소하여 통신사의 파견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보고되지 못했다.
      선생이 아직 돌아오기 전에 임금이 이조판서 홍성민(洪聖民)에게 선생의 서용(敍用 을 명하니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천거하였다가 퇴짜를 맞고 
      다시 예조정랑(礼曹正郎)에 천거하니 임금이 노하여 그 직을 면하게 하였다. 선생이 돌아오는 길에 이 사실을 알고 대궐 앞에서 거적을 깔고 죄를 기다리며 
      3일 동안 물러가지 않으니 성안 사람들이 그 충의(忠義)에 감탄하였다.
  • 111590년(선조 23년 庚寅 47세)
     봄에 이발(李溌)의 어머니 윤씨(尹氏)를 길에서 뵈다.
     선생은 처음에 이발과 극진한 사이였으나 그 후 절교하였는데 이발 형제가 역모에 연루되어 이미 죽었고, 
      어머니 윤 씨가 잡혀감에 선생은 옥천에서 술과 옷을 가지고 중간에서 윤씨 부인을 맞이하고 술잔을 권하며 털옷을 주어 위로한 뒤 서로 통곡하며 이별하였다. 또, 이발의 첩에게도 옷을 주었다.
     고운사(孤雲寺)에서 노닐다.
     여름에 금천사(金泉寺)에서 강학하다.
     12월, 영남지방을 노닐 때에 정몽주(鄭夢周)의 유상(遺像)과 박팽년(朴彭年)의 사 당(祠堂)에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관찰사 홍성민(洪聖民)과 수일간 강론하고 돌아오다.
  • 121591년(선조 24년 辛卯 48세)
     정월에 영남(嶺南)에서 돌아오다.
      3월, 지부상소(持斧上疏)하여 왜사(倭使)의 목을 참(斬)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이때 선생이 승정원(承政院) 문밖에서 3일을 기다렸으나 비답이 없자 주춧돌에 이마를 받아 피가 얼굴에 흐르니 보는 사람들의 의논이 엇갈렸다. 선생은 “명년에 산곡(山谷)으로 피난 갈 때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보내는 글, 대마도, 일본 유민(日本遺民)에 보내는 글, 일본 사신 현소(玄蘇)의 목을 베는 죄목, 영·호남의 왜적방비책 등을 지어 올렸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선생은 나라 일이 어쩔 수 없음에 통곡하고 옥천으로 돌아와 하늘을 보며 탄식으로 보냈다.
     윤3월, 박로(朴輅) 전승업(全承業) 등 문인과 서정천 하류에서 노닐다 
      선생은 “내가 왜국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에 아룀으로써 뒷날의 책망을 면하고자 하였으나  조정신하들이 내말을 듣지 않았다.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반드시 유구(琉球)에 고변이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화(禍)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니 제군은 이런 때에 어찌  피를 찍어 상소함으로서 임금을 깨닫게 하지 못하는가?”하며 눈물을 흘렸다.
      4월, 아들 완도(完堵)를 시켜 평안관찰사 권징(権徴)과 연안부사 신각(申恪)에게 글을 보내 호를 파고 성(城)을 수축하여 수전(守戦)에 방비를 권하다. 
      권징은 웃으며 “설사 왜적이 쳐들어온다 하여도 양서(황해도와 평안도)에 까지 미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각은 선생의 말을 믿고 방어의 대책을 세워 뒷날 왜병을 물리 칠 수 있었다. 
     7월, 금산(錦山)으로 남창 김현성(南窓 金玄成)을 방문하다.
     이때 박정노(朴廷老)가 선생을 쫓아 영벽루(暎碧楼)에 올랐는데 저녁나절에 갑자기 붉은 기운이 동방(東方)에서 일어나 북(北)‧서(西)‧서남(西南) 간에 세 갈래로 나뉘면서 땅을 비추었다. 선생은 이를 보고 박정노에게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대가 이미 출동하여 명년에 크게 침입하기를 이 기운과 같을 것이다”라고 예언하다.
     다음날, 김현성과 관찰사에게 급히 방어의 계책을 세우라 하였으나 관찰사 이광(李洸)은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
     겨울에 대둔산(大屯山)에 들어가 산곡을 헤매며 높은 산에 올라 먼 데를 보며 나라 일을 탄식하였다. 
    하루는 네 명의 중과 식사를 하며 “명년에는 반드시 왜란이 있을 것이며 나는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모실 것이니 이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은 함께 나와서 나라를 돕자”고 하였다. 
    다음 해에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중 두  사람은 선생을 따라 죽었고,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며, 한 사람은 병으로 참전치 못하여 같이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11월, 공주의 공암(孔岩)에 가서 서기(徐起)를 조상하다.
  • 131592년(선조 25년 壬辰 49세)   ※세부 내용은 중봉집(重峰集) 참조
     2월 28일, 부인 신(辛)씨가 죽다.
     3월, 김포 선영(先塋)을 찾아 장차 변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영원히 물러 간다는 뜻의 제문을 지어 고유(告由)하다.
      4월 20일, 부인 신씨를 집 뒤에 장사 지낼 때 천고(天鼓)가 울리니 모두 돌아가 피난 준비를 권하다.
      왜군이 침입하니 어머니를 청주면(青州面) 선유동(仙遊洞) 피난시키고 오다. 
     5월 3일, 청주에서 문인들과 격문(檄文)을 띄우다.
     5월 하순 문인들과 향병 수백 인을 모아 보은 차령(車嶺에서 왜군을 만나 선생이 선봉으로 싸워 물리치다. 이후로 왜군은 이 길을 사용하지 못했다. 
     6월, 문인들과 공주에서 격문을 보내니 의병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며칠 사이에  1,000여 명이 되었다. 
      충청순찰사 윤선각(尹先覚)이 안세현의 꾐에 빠져 의병을 탄압하니 모두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호우(湖右)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니 1,600여 명이 모여들었다. 
     7월 4일, 웅진 용당(熊津 竜堂)에서 제사 지내고 군사를 위로하며 출정식을 하다. 
     8월 1일, 청주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성(城)을 회복하였다.
     청주성의 왜적을 격파 후, 전승업(全承業)과 아들 완도(完堵)를 행재소로 보내다.
      이어서 행재소로 근왕하기위해 의병을 이끌고 아산에 도착하다. 순찰사가 사람을 보내 먼저 금산의 적을 함께 칠 것을 제안하다. 
      선생은 의병을 회군하여 공주로 왔으나 순찰사가 약속을 배반하고 의병을 탄압하여 모두 흩어지고 끝까지 선생을 따르려는 의병 700 명만 남았다.
     8월 15일, 행조에서 선생에게 교지를 내려 봉사시첨정(奉常寺僉正)에 제수하다.
     8월 16일, 전라도 순찰사 권율(権慄)과 금산의 적을 치기 위해 공주를 출발하다.
    유성에서 영규의 승병과 합진하여 금산으로 향하다.
     8월 17일, 금산성 10리 앞까지 진출하였으나, 권율이 일정의 연기를 통보한 것을 받지 못하고 적의 기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8월 18일, 중과부적으로 적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선생과 700의사 모두 순절하다.

殉節 後 年表

•1592년(선조 25년 壬辰 49세) 순절하신 다음 날 아우 범(範)이 시신을 거두어 4일 후 안읍(安邑) 도리동(道里洞)에 장사 지내다.
               12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参判) 겸(兼) 동지경연춘추관(同知経筵春秋館)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증직되다.
•1603년(선조 36년 癸卯) 호남‧호서의 유생과 선비가 금산의 순절한 곳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우다.
•1604년(선조 37년 甲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従功臣) 일등(一等)으로 공신록(功臣録)에 오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兼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学) 예문관대제학(芸文館大提学) 지경연(知経筵) 성균관(成均館) 춘추관(春秋館) 의금부사(義禁府事) 세좌좌빈객(世子左賓客)에 증직되다.
12월에 예조좌랑(礼曹佐郎) 윤광계(尹光啓)를 보내 치제(致祭)하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성진선(成晉善)을 특별히 보내 묘(墓)를 지킬 오가(五家)를 주어 밭 오결(五結)을 감조케 하고 또 복호(復戸)를 명하다.
•1609년(광해군 원년 己酉) 명을 내려 정려(旌閭) 하다.
•1613년(광해군 5년 癸丑) 기보(畿輔)의 선비들이 김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다.
•1615년(광해군 7년 乙卯) 아들 완기(完基)의 효자문(孝子門)을 정표(旌表)하다.
•1636년(인조 14년 丙子) 10월 21일에 선생의 묘소를 옥천군 안남면 미산(薇山)에 이장하다.
•1649년(인조 27년 己丑) 시호(諡号)를 내려 문열(文烈)이라 하다.
•1653년(효종 4년 癸巳) 7월 17일에 예조좌랑(礼曹佐郎) 정동엽(鄭東燁)을 금산에 보내어 종용사(従容祠) 의단에 치제하다.
•1656년(효종 7년 丙申)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다.
•1663년(현종 4년 癸卯) 예조 관리(礼曹官吏)를 보내 치제하다.
•1665년(현종 6년 乙巳) 5월 7일에 예조좌랑(礼曹佐郎) 류송제(柳松斉)를 보내어 묘소(墓所)에 치제하다.
•1670년(현종 11년 庚戌) 4월 10일에 사인(舎人) 이훤(李藼)을 보내어 의단(義壇)에 치제하다.
•1671년(현종 12년 辛亥) 5월에 예관 김총(金총)을 보내어 의단(義壇)에 치제하다.
•1673년(현종 14년 癸丑) 완기(完基)에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증직하다.
•1684년(숙종 10년 甲子) 7월 17일 장령(掌令) 권달(権怛)을 보내어 의단(義壇)에 치제하다.
•1671년(숙종 25년 己卯) 근신(近信)을 보내 의단에 치제하다. 
•1710년(숙종 36년 庚寅) 청주(清州)의 유생들이 청주 싸움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다.
•1712년(숙종 38년 壬辰) 5월 15일에 부사직(副司直) 김시섭(金始燮)을 보내어 의단에 치제하다.
•1717년(숙종 43년 丁酉) 3월 16일 예조정랑(礼曹正郎) 김윤해(金潤海)를 보내어 묘소(墓所)에 치제하다.
 7월 17일에 다시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다.
•1718년(숙종 44년 戊戌) 5월 7일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다.
•1734년(영조 10년 甲寅) 6월 18일에 자손은 적손(嫡孫)이나 지손(支孫)을 가리지 않고 녹용(錄用)케 하다.
7월 19일 부수찬(副修撰) 유건기(劉健基)를 특별히 보내어 종용사 및 의총에 치제하다.
9월 25일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다.
•1740(숙종 16년 庚申) 7월에 선생의 문집(文集) 간행(刊行)을 명하다.
•1883년(고종 20년 癸未) 11월 21일 관학유생(館学儒生) 및 팔도(八道) 유생(儒生)의 상소(上疏)에 따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다.